답사를 가다 - 2 : 만성리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로 왔다. 여순항쟁 답사가 대체로 마무리되는 곳이 만성리라고 한다.
만성리에는 여수 지역의 대표적인 학살지인, '여순사건 위령비'와 '형제묘'가 있다.
전남 동부는 특정한 곳만 학살지가 아니다.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나마 가장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이곳 여수 만성리에 있는 '형제묘'이다.
만성리 학살지를 답사하기 위해선 반드시 마래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이 터널은 1930년 준공되어, 광주와 여수를 잇는 총 길이 160km 광려선의 철도굴이다.
마래터널을 뚫는 과정은 험난했는데, 여수신항 개발과 마래터널 건설 과정에는 일명 꾸리라고 불린 중국인 노무자가 강제 동원되었다.
만흥동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침에는 벌떼처럼 사람들이 일하러 가는데 돌아올 때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증언에서 많은 중국인 노무자의 죽음 또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바다를 옆에 끼고 즐겁게 레일바이크를 타는 이곳. 바로 맞은편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빨갱이'로 몰리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아이들에게 "작은 돌멩이라도 하나 던져 주어라"라는 말을 전하며, 그들만의 애도를 표했다. 그 기억이 전승되어 여순항쟁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장소로 남았다.
'여순사건 위령비'를 지나면 형제묘 학살지를 마주한다.
형제묘의 안내문은 여느 학살지의 안내문보다 끔찍하다.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한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 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증언하였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한다.
안내문 옆으로 난 계단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형제묘가 나온다.
여사연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형제묘 안내판에 기술된 내용을 증언한 사람은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 최명균이 아닌, 신용식이다. 학살 날짜에 대해서도 최명균이나 신용신은 특정하지 못했는데, 1948년 10월 20일 여수군 인민대회에서 여맹을 대표해 연설한 정기순의 증언에서 오빠 정기만이 1949년 1월 13일 이곳에서 학살됐다고 밝히면서 학살 날짜를 특정하게 되었다.
형제묘 옆에는 조그만 무덤과 있고 비석도 서 있는데 묘비에는 정기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기순의 오빠와 동생이다.
우리는 형제묘 앞에서 주철희 박사님의 『여순항쟁답사기1』 10장 형제묘, 잔학한 학살의 진실을 낭독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며 묵념했다. 주철희 박사님이 책에 쓴 문장, 이제부터라도 여순항쟁의 역사를 올곧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역사의 정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곱씹었다.
- 주철희, 『여순항쟁답사기1』, 흐름, 2023년
발제하여 이 글을 썼다.